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군 (문단 편집) === 초원 전술 === 몽골군의 야전 전술은 다소 거칠게 비약하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나눌 수 있다. 척후병을 활용한 정보 수집, 전장 선택권 유지, 산개대형 유지와 소규모 부대의 유기적인 움직임, 이를 바탕으로 한 포위섬멸전, 각종 기만전술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동력과 지구력이었다. 《원조비사》에는 몽골군의 기본적인 전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195절에는 군대를 다룰 때 >'''"카르가나[* 식물의 일종.]처럼 나아가고, 호수처럼 나아가며, 끌처럼 나아가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그 유명한 끌 전법에 대한 내용으로 보통 '''초총행'''(草叢行), '''해진립'''(海陣立), '''착전법'''(鑿戰法)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게 무슨 소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원조비사》 자체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은유적이고 모호한 표현들이 많은데 이 구절도 그 중 하나이다. 대개 초총행과 해진립은 산개전술과 집단전술로, 착전법은 돌격전술로 추측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제각각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근거도 갖추고 있다. [[http://tarnatos.tistory.com/34|테무진to the칸]][* 《딴지일보》 내 원글에서는 일부 이미지가 짤려 있어 백업본으로 대체]에서 [[차키르마우트 전투]]를 배경으로 묘사한 끌 전법. 중간 부분부터 시작한다. 《흑달사략》에는 기병 전술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대강 이런 내용이다. >먼저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싸우고, 불리할 때는 싸우지 않았다. 빠르게 적의 허실을 파악할 수 있고, 적은 수로 대군을 포위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선봉대(돌격대)에 의지하는 것이 원칙이나 실제로는 선봉이 나서지 않고, 전원이 일제히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항상 산개 대형을 이루어, 보병을 상대할 때는 대오를 갖추고 기병과 싸울 때는 갖추지 않았다. 적의 움직임에 반응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많은 수가 몰려왔다가 적은 수도 몰려오고, 모였다 흩어지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벼락처럼 돌진했다. 높은 곳에서 관망하다가 기병대가 돌격하는데 공격으로 적이 흔들리지 않으면 연이어 재차 돌격했다. 적의 좌우 배후에서 포위한 후 일시에 공격한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으면 가축들을 돌진시킨다. 허장성세를 부리거나 심리전을 펼치기도 한다. 거짓패배 후 매복으로 적을 섬멸한다. 패배한 적의 수장은 반드시 추격하여 사로잡는다. 몽골군이 야전에서 남송군보다 월등히 강했기에 어느 정도 감탄스러운 어조가 묻어나지만 기본적으로 몽골군이 기동력을 이용한 전방위 타격전술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 구절은 유목민족들의 군대가 흔히 보여주는 전장 선택 방식인데 기동력을 활용하여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전장 선택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후퇴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는 마르코 폴로의 말과도 일치한다. 대부분의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몽골군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군사활동을 개시했다. 이 시기는 정주민족의 수확철이었기 때문에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아져 병력이 감소하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군세가 강한 적과 싸울 때 지연전술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아예 적과의 교전을 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소규모의 병력만 남기고, 본대를 일정 거리에 철수시킨 후 적이 병력을 줄이면 빠르게 되돌아와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첩보활동은 가장 기본적인 전술인 동시에 철저하게 지켜졌다. 척후병은 본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정보를 수집했는데 주로 현지인을 사로잡아 적의 허실을 파악했다. 적병의 수와 위치, 식량의 위치와 양, 목초지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이들은 본영에서 이틀 거리까지 앞서 나가 정보를 수집했다. 사상자가 발생하는 정면 충돌을 최대한 피했고, 적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 역시 [[스웜 전술]]의 기본적인 방식으로 출혈이 큰 백병전은 최후의 일격으로 남겨두고, 그 이전에는 원거리에서의 사격으로 적의 기세를 꺾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백병전을 벌이지 않고 적의 주위를 맴돌며 사격했다고 전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군이 탄막을 형성하는 집중사격으로 적을 제압했다고 보는데, 이 전술은 16세기 유럽의 [[카라콜]]과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하나의 자군을 5개로 나누어 2개 아르밧씩 짝지웠다. 이 중 4쌍(8 아르밧)이 활을 쏘고, 1쌍(2 아르밧)이 돌격을 준비했다. 먼저 궁기병들은 긴 타원을 그리며 적에게 접근했고, 시간차로 전위의 부대가 적에게 사격을 가한 후 물러났다. 그 자리를 뒤따르는 2 아르밧이 채우면서 적에게 접근했다가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계속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사격은 조준사격이 아닌 특정 지역을 목표로 한 탄막을 형성했으며, 일반적으로 1시간의 사격에서 화살통의 화살 60개를 소모했다고 한다. 적의 대오가 무너지면 대기하고 있었던 2개의 아르밧이 돌격하여 접근전으로 마무리했다. 이 전술은 기마사격에 대한 개인적인 기량 외에도 각 자군과 아르밧이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쓸 수 없었는데 그만큼 훈련이 잘 된 군대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통상적인 전술에서도 중장기병이 운용되었으며, 이때 궁기병과 돌격병의 비율은 약 4 : 1 정도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기마사격뿐 아니라 보사(步射)를 하기도 했다. 조공에 의하면 방패를 찬 돌격병들이 적을 향해 돌격하다가 말에서 내려 화살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 발을 쏘고 난 후 두 번째로 쏠 때는 반드시 적진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근거리에서의 조준사격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만큼 위력도 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몽골군의 포위섬멸전을 살펴보려면 평시에 이루어졌던 사냥인 '''네르제(바투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전시에 이루어지는 포위전의 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사냥으로 특히 칸이 참여하는 사냥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사냥에 참가한 몰이꾼들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사냥감을 몰아넣고 포위망이 형성되면 칸이 화살을 쏘는 것을 시작으로 사격을 가했다. 실수로 사냥감을 놓치면 벌을 받았는데, 이로 알 수 있듯이 네르제는 거의 군사훈련에 준하는 행사였다. 페르시아의 역사가인 주바이니는 몽골인들이 안장과 말 사이에서 나고 자라며 평생을 사냥감을 쫓으며 산다고 했다. 더불어 그는 몽골인들은 저절로 전투하는 법을 알게 된다고도 했다. 전장에서의 포위전은 소규모 부대로 갈라져 적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몽골군은 중군(바라군 가르)과 좌익(제운 가르), 우익(콜 가르)으로 포진했고, 중군이 적과 교전하는 사이 좌우익이 소규모 부대로 갈라져 적을 포위했다. 포위망이 완성되면 사방에서 함성과 동시에 적을 공격해 혼란에 빠뜨렸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을 상대할 때는 일부러 혈로를 터줘서 달아나도록 한 뒤 기습하기도 했다. 산개대형을 유지하며 소규모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전술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의미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에 기동력과 조직력을 더해지면서 대단히 무서운 군대가 되었다. 중국인은 이를 두고 수백 수천 명이 일시에 움직였다가 흩어진다고 표현했다. 적의 군세가 강할 때는 임기응변이 필요했다. 위장퇴각은 유목민들이 즐겨 사용하던 전법이었다. 적과 접전을 벌인 후 패배한 척 달아나다가 매복한 군사들과 함께 적을 일시에 습격하는 방법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은 후퇴할 때도 계속 화살을 날려 적을 향해 돌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싸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위장퇴각은 자칫하면 진짜 패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조직력을 필요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